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화도 회군 (문단 편집) === 나하추의 투항 === >홍무 20년, 풍승(馮勝)에게 명령하여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으로 삼아 영국공(潁國公) 부우덕, 영창후(永昌侯) 남옥을 좌•우부장군으로 삼아, 남웅후(南雄侯) 조용(趙庸) 등에게 보병과 기병 200,000명을 거느리고 이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중략) '''나하추는 대적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 나리오[* 먼저 항복했던 나하추의 옛 부관.]의 말로 인하여 항복을 청하였다. >{{{#!wiki style="text-align:right" 《명사》(明史) <풍승전>}}}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oi67.tinypic.com/hwlbgz.jpg|width=100%]]}}} || || {{{#000000 ▲'''나하추의 세력지였던 금산(金山)의 위치''' }}} || 1387년, 잘라이르 나하추는 결국 명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1375년 이후 악화된 전황으로 몽골의 주요 장수들은 속속 명나라에 투항했고, 고려와의 연계도 명나라의 외교적 노력 때문에 여의치 않자 나하추는 외로운 형세가 되었다. 그리고 본인도 '''금산 전투'''에서 패배해 가진 병력을 잃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무제는 풍승(馮勝)을 대장으로 삼아 무려 200,000명이라는 엄청난 대군을 동원하여 나하추의 세력지인 금산을 압박했다.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이렇게 막대한 군사적 위협을 받자 나하추는 더이상 저항할 수 없었고, 여기에 더해 명군이 회유 작전 역시 병행하자 나하추는 결국 항복을 하고 만다. 이로 인하여 명나라는 요동 지역을 평정할 수 있었다. 나하추의 투항은 요동 지역 뿐만 아니라 전 몽골에 심대한 타격을 안겨주었다. 특히 북원의 [[천원제]] 테구스테무르(脫古思帖木兒) 정권은 재기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입었는데 이는 나하추가 투항함으로써 요동 지역 접근이 차단되었고, 그렇게 된 이상 북원 정권은 일개 초원의 유목민 정권으로 남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후 몽골측 투항자는 [[굴비]]를 엮듯 줄줄 딸려오기 시작하여 나하추가 투항한 이후에는 20만 호, 천원제의 패배 이후에는 최대 60만 호에 달하였다. 골칫거리였던 요동의 나하추 세력이 붕괴되면서 명나라는 큰 자신감을 얻게 되었고, 이제 더 이상 북원과 고려의 연대를 고려하며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자신감은 충분히 근거가 있는데, 나하추의 항복으로부터 1년여 뒤, '''위화도 회군의 불과 얼마 전''' 명나라의 대규모 군대가 초원으로 진군하여 '''북원을 완전히 멸망시켜 버렸다.''' >홍무 21년, 3월 남옥에게 명하여 군대 150,000명을 거느리고 이를 정벌하게 하였다. >(중략) 창졸간(倉卒間)에 그 앞에 이르자, (그들이) 크게 놀라 맞아 싸웠으나, 적을 패배시켰다. >{{{#!wiki style="text-align:right" 《명사》(明史) <남옥전>}}} 1388년 3월, 150,000명에 달하는 명나라 대군은 북원의 수도 [[카라코룸]]을 급습하여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남옥은 '''포로만 무려 80,000명''' 가까이에 이르는 승리를 거두었고, 이 시점에서 북원 정권은 완전히 멸망했다. 달아난 천원제 테구스테무르는 [[조리그투 칸|예수데르]](也速迭兒)라는 인물에게 살해되었는데, 예수데르는 과거 원 세조 [[쿠빌라이 칸]]과의 툴루이 내전에서 패배한 [[아리크부카]]의 후예로서 긴 시간이 흘러 쿠빌라이 칸의 후예에게 복수를 한 셈이 되었다. 이후 조리그투 칸 예수데르는 소위 '''[[타타르]]'''(Tatar, 달단)라고 불리우는 정권을 세워 나중에는 서몽골의 [[오이라트]]와 더불어 명나라의 골칫거리가 되었지만, 당장은 남옥에게 당한 대패 때문에 본인들 수습도 어려운 판국이었다. 여하간 나하추를 항복시킨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예 북원을 괴멸시키려 했을 정도니, 당시 명나라는 군사적, 외교적 행보에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던 판이었다. 더 이상 고려가 다른 나라와 힘을 합치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었기에 다시 강경책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나하추의 투항 이후 명나라의 공격이 직접적으로 가능해졌다는 불안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